문화

잊지 못할 중국 서안(西安)의 진시황(秦始皇) 병마용(兵马俑)

ccsc 2025. 8. 2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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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글자체 - 현재는 글자가 어려워 상용화 되지 않고 있음)

  병마용은 진시황릉 병마용을 말한다. 이를 줄여 진병마용 혹은 진용이라고 부르며, 첫번째로 지정된 전국 중요 문물 보호구역이며, 중국 세계 문화 유산이다. 진시황 병마용은 산시성 서안시 임통구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5천미터의 병마용 구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시황제릉 박물관의 중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세계 200명의 넘는 각국의 지도자들이 참관을 하였고, 중국 고대의 휘황 찬란한 문명의 황금 빛 명함이며, 세계 10대 고대 무덤 보물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병마용은 진시황이 6개국을 점령하고, 천하 통일을 이룬 군사 대국 장면과 진짜와 같은 도자기 형상의 병마용과 위엄하고 엄정한 군사진열은 사람들에게 고대 동방 문화의 휘황 찬란함을 보여주었다.

 

(1)역사적인 배경

  산 사람을 매장하는 제도는 최초의 공유제가 무너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했고, 노예제도가 생기면서 흥행을 하게 되는 매우 잔인하고 야만적인 매장제도이다. 이 매장 제도가 가장 흥행 할 때는 은상(殷商)시기로써, 상(商)대의 귀족들 큰 무덤에 사람을 순장하였다. 안양의 은허(殷墟)왕릉구역에서도 이미 10개가 넘는 큰 무덤에서도 생매장 및 살생을 한 사구가 5천구가 넘게 발견되었다.

  주왕조는 은상의 폭정을 교훈 삼아, 명덕보민(明德保民/중국 고대의 유가의 정치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써, 통치자의 미덕을 통해서 민중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국가 통치의 장기적인 안정을 실현한다는 뜻)을 강조하였다. 주례(周礼/주나라의 예절 시스템으로, 사회규범 및 예의범절, 예법에 관한 절차등이 담겨 있다)의 탄생과 실천은 생매장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억제를 하였지만, 뿌리를 뽑아 내지는 못했다. 춘추시기에 와서는 열국이 다투고, 시대가 혼란함으로 인해 다시 생매장 절차가 부활하였다.

전국 시대에는 각국의 귀족들의 생매장 제도를 폐지하였다. 진헌(秦、献) 공원년(서기381년)에 금지되었다. 진나라는 정식으로 생매장 제도를 폐지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의 사회 변혁은 장례 문화에 변화를 가지고 왔고, 이때 흙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용/俑)으로 매장하였고, 도자기나 나무로 만든 인형으로 대체하여 매장을 하였다. 용(俑)의 본의는 사람을 매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인형의 출현으로 천천히 사라졌고, 용(俑)은 무덤 중의 도자기 조각, 돌 조각, 사람 조각 등으로 변했다. 진의 병마용은 바로 용을 사람으로 대체하여 순장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병마용은 규모나 사실 정도상 이렇게 높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인들의 지혜 이외에도 역사상 첫번째 봉건황제인 진시황의 의지가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였다.

 

(2)건축구조

  진시황 병마용과 함께 매장한 구덩이는 좌상동에 위치하고 있다. 제1호 구덩이가 처음으로 발견 되었고, 직사각형 모형으로 그 안에는 8000 여 개의 병마용이 매장되어 있었고, 사면으로 기울어진 길이 있었다. 제1호 구덩이는 좌우 양쪽으로는 각각 제2호, 제3호 구덩이이다. 병마용 구덩이는 지하갱도로 된 토목구조 건축이다. 이는 깊이가 5미터 되는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의 중간에서부터 하나하나씩 평평하게 중간 흙벽을 쌓아 만들었다. 흙벽 양쪽으로는 토목 재질의 기둥이 있고, 기둥 윗쪽으로는 가로 지지대가 놓여 있으며, 가로목과 흙으로 된 벽에는 빽빽하게 지붕이 세워져 있으며, 지붕 위에는 삿자리를 깔고 황토를 덮어 구덩이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이 지붕은 당시 지표면보다 약 2미터 높았습니다. 웅덩이 바닥은 청벽돌로 포장되었습니다. 구덩이 천장에서 구덩이 바닥까지의 공간 높이는 3.2미터입니다. 병마용과 말을 구덩이에 넣은 후, 사방의 문을 나무로 막았고, 문 안쪽은 흙을 채워 폐쇄형 지하 건축물이 형성되었습니다.

제1호 구덩이 : 첫번재 3줄에 서 있는 병마용은 갑옷을 입지 않고 있는 노예 병사들

(3)유적지

  1974년-1977년 진시황릉은 동쪽으로 1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고, 발굴 시 진시황릉과 함께 매장한 구덩이 중의 하나인 병마용 구덩이였다. 제1호 구덩이는 남쪽으로 동서 길이가 230미터, 너비가 62미터, 면적이 14,260 평방미터이다. 제2호 구덩이는 동서 길이가 124미터, 너비가 98미터, 전용면적이 6,000평방미터이다. 제3호 구덩이의 전용 면적은 520평방미터이다. 토출 해 낸 병마용 사병은 800개이며, 목재 전차는 18개, 도자기로 만든 말은 100마리가 넘는다. 현재 병마용의 진열 방식으로 추산해 보면, 이 3개 구덩이의 병사는 7,000 개이며, 전차는 100개, 말은 100마리이며, 병사의 신체가 매우 커 평균 1.8미터정도에 이른다.

현재에도 계속 발굴과 복구가 진행 되고 있으며 ....

(4)색채공예

  병마용은 토출 당시 원래는 칼라 색이였다. 토출 당시 색채는 대부분이 이미 없어졌다. 병마용의 신체에 점 같은 잔류만 남아 있고, 남아 있는 색채는 비교적 윤기가 있고 새것 같다. 병마용 신체의 색깔을 분석 한 결과, 진시황 병마용의 복장 색깔과 특징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토출 해 낸 병마용 옷과 장식품의 색깔을 통해서 일차적인 통계와 분석을 통해서, 진시황의 복장 색깔 종류가 다양하고, 상의 색깔은 분홍녹색, 주홍, 자홍, 분홍, 파란, 흰색, 주석색 등이 있었고, 목의 카라와 소매 및 깃의 변에는 칼라색으로 장식 되어 있었다. 바지의 색깔은 보통 분녹색, 홍색, 파란색 분홍자두색, 흰색등이였고, 결과적으로 진시황 병마용의 복장 색깔은 화려하나 통일 되지 않았다. 가장 많은 색깔은 분녹색, 주홍색, 분홍자두색, 파란색 등 4가지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그로 인해 이런 4가지 색깔은 진시황 복장의 중요한 색채이다. 화학 실험 결과 이런 색깔은 모두 광물질로 나타났다. 이런 광물질은 모두 중국 전통의 회화의 주요 연료이며, 진시황 병마용으로 이렇게 풍부한 광물질 색채를 사용하는 것은 2000년 전부터 중국의 백성들은 이미 대량으로 생산 및 광범위하게 염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토출 당시의 병마용의 색깔

일부 병마용의 허리 부분의 붉은 색 끈에만 색깔이 남아 있기도 하다

화려한 색을 띄고 있는 병마용

  진시황은 생전에 1만명이 넘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 중 8000명을 뽑아 그 모형을 본따 병마용을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진시황은 살아서 천하 통일을 이룬 것 처럼 죽어서도 지하를 제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6개국을 통일 한 후 등제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08년 까지 총 38년에 거쳐 이 무덤을 건축했다. 이는 또한 당시의 군사적 권위를 드러내고, 당시 순장 제도를 그대로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4호 구덩이도 발견이 되었지만 당시 진시황 정권 말기 농민들의 발란 등으로 완성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 작업을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1958년, 중국은 정릉의 발굴 작업을 완료하여 이 400여 년 된 무덤에서 3000점의 유물을 발굴했으며, 여기에는 황제의 용포와 황후의 봉황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가 떠들썩해졌고, 모두가 성공적인 발굴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발굴 후 기이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발굴에 참여한 많은 전문가들이 계속 불운을 맞았고, 심지어 기이하게 사망했고, 묘지 주변 사람들도 갑작스럽게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 후 주은래(周恩来) 총리는 "백년 동안 제왕릉을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능묘 발굴을 꺼려하며, 황릉을 대규모로 파헤치는 것은 큰 압력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발굴 과정은 국가가 막대한 자금과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백년 부동제왕릉'의 이 지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출토되지 않은 문화의 보호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막대한 책임과 짐을 짊어진이상, 모든 문화재가 적절히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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